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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최약국명안’(崔藥局命案)의 재구성Restoration of Murder Case in the Choi's Drugstore in 1884

Other Titles
Restoration of Murder Case in the Choi's Drugstore in 1884
Authors
권인용
Issue Date
2014
Publisher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Keywords
명안; 필화; 회심; 진수당; 원세개; Murder case in the Choi' s drugstore; Slip of the pen; Court hearing; Chen Shutang; Yuan Shikai
Citation
아세아연구, v.57, no.1, pp.73 - 108
Indexed
KCI
Journal Title
아세아연구
Volume
57
Number
1
Start Page
73
End Page
108
URI
https://scholar.korea.ac.kr/handle/2021.sw.korea/100644
ISSN
1226-4385
Abstract
1884년 1월 2일 밤 10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한성 종로 일대 최씨 약국에서 참극이 발생했다. 중국 병사로 추정되는 3인이 청심환 구매과정에서 실랑이가 벌어진 끝에 주인을 총으로 쏘고, 그 아들에게 총격을 가한 뒤 칼을 휘둘렀다. 다음날 새벽 부자의 운명이 갈렸다. 주인은 극적으로 소생하였으나 아들은 결국 사망했다. 도주했던 3명의 참수 소식은 11일자 『한성순보』에 보도되었다.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사건은 이런 정도로 종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살인사건이 필화사건으로 전화된다. 주동적인 역할을 한 자는 청국의 진수당이었다. 진수당은 조선 당국에 『한성순보』가 참수된 3인을 범인으로 단정한 근거를 묻는 조회(照會)를 보냈다. 조선 당국은 실수를 자인했다. 3월말 진수당은 2장의 고시(告示)를 작성하는 한편 조선 당국과 청의 각급 관원에게 보내는 공문과 서신을 집중적으로 발송하였다. 특히 이홍장에게 2장의 공문을 부탁하였다.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자문(咨文)과 원세개에게 보내는 찰칙(札飭)이었다. 전자는 조선에 대한 최대의 압박 카드였고, 후자는 협력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원세개를 추동하기 위한 확실한 담보였다. 이홍장의 행보는 신중했다. 찰칙은 보냈지만, 자문 발송은 거부했다. 이홍장이 이 사건과 관련해서 조선에 외교문서를 직접 발송했다는 가설이 기존 연구에서 정설처럼 통용되고 있지만, 사실무근이었다. 한편 조선 당국은 진수당의 조회에 성의를 보였다. 2장의 고시를 도성 각처에 포고하고, 한성순보에도 전재하였으며,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한성순보에서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청측의 강력한 관심 표명 하에 일정한 ‘양보’는 불가피했던 셈이다. 필화의 마무리였다. 필화 국면은 종식되었지만, 여진은 만만치 않았다. 자문 발송이라는 회심의 카드가 무산된 이후 진수당은 대안 모색에 나섰다. 이홍장의 찰칙을 받은 이상 원세개도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내민 카드는 회심(會審)이었다.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소환하여 조선과 청 양국 관원 공동주관의 심리를 강력 추진하여 끝내 관철시켰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양인은 치밀한 사전 협의를 거쳤다. 이 때 논의의 주도권이 원세개에게 넘어갔다. 법정에서의 심리는 진수당이 담당하였지만, 의정부와의 조율, 회심의 일정과 장소 모두 원세개가 결정하였다. 필화 국면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5월 17일 대망의 회심이 열렸다. 법리와 경험 모두 미숙한 진수당의 완패였다. 관련자들의 진술은 완곡했지만, 범인이 중국 병사처럼 보였다는 원래의 입장을 견지했다. 출구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로는 원세개가 제시했다. 미제사건으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진수당은 미련이 남았다. 전문 인력을 대타로 내세워 다시 한 번 회심 카드를 꺼내자고 하였다. 원세개는 냉정하게 거절하였다. 충분한 시간적 여유 속에서 유인책으로 단서를 포착하는 것이 현실적임을 설득했다. 진수당은 전면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인은 공동명의로 이홍장에게 품문을 올려 이상의 내용을 보고하였고, 윤5월 3일 추인의 비문을 받았다. 공식적으로 영구 미제사건으로 마감되었던 것이다. 6개월에 걸친 한중 양국의 외교현안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최약국명안의 추이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측면은 본건이 한중 양국 간의 외교전으로 비화한 이후 청측의 대표 주자가 바뀐다는 점이다. 용의자 3명의 처형까지를 제1막, 필화 국면을 제2막, 회심과 그 이후를 제3막으로 상정한다면, 본격적인 외교전은 제2막부터이다. 제2막은 진수당, 제3막은 원세개가 각각 주인공이었다. 진수당은 집착으로 보일 정도로 사건의 파장을 계속 키워갔지만, 그 끝은 허망했다. 진수당의 집요함은 오히려 조선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저하시키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요컨대, 진수당과 원세개 양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이 명안의 파고 속에서 역전의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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