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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세종의 별궁(別宮) 이거(移居)The political implication of King Sejong's Byeol-Gung-I-Geo (Moving around the separate palace) in Joseon Dynasty

Other Titles
The political implication of King Sejong's Byeol-Gung-I-Geo (Moving around the separate palace) in Joseon Dynasty
Authors
김순남
Issue Date
2020
Publisher
호서사학회
Keywords
세종; 태종; 경덕궁; 연희궁; 별궁 이거; 피접; 세자; 사왕(嗣王); 정치적 유용성; Sejong; Taejong; Gyeong-Deok palace; Yeon-Hui palace; the crown prince; a succeeding king; the political use of Moving around the separate palace
Citation
역사와 담론, no.96, pp.35 - 72
Indexed
KCI
Journal Title
역사와 담론
Number
96
Start Page
35
End Page
72
URI
https://scholar.korea.ac.kr/handle/2021.sw.korea/131138
DOI
10.22899/hosuh..96.202010.35
ISSN
1226-8089
Abstract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세자 양녕의 배웅을 받고 개경으로 옮겨갔다가 세자 충녕의 영접을 받으며 한양으로 돌아와 선위(禪位)하고 궁 밖 별궁을 새로 지어 전전했다. 이 동안 세종은 아버지의 비호 아래 사왕(嗣王)으로서의 권위를 정립했다. 세종 역시 부왕 태종의 예에 따라 궁 밖으로 나가 피접했는데, 1442년(세종 24) 첨사원 설치를 계기로는 아예 세자에게 선위하고 별도의 궁을 지어 상왕으로 거처하려 했다. 세종은 별궁의 신설이 무산되자 부왕(父王)이 지어 준 연희궁을 주로 삼되, 형제와 아들과 사위의 집을 전전하면서 궁 밖에 거처했다. 이 동안 세자는 아버지를 대신해 서무를 처결하고 이후에는 심지어 칭신하는 관료의 조참과 4배례까지 받음으로써 그 위상을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군신 갈등이 불거졌는데 세종은 이를 ‘별궁 이거’를 무기로 해소했다. 세종의 이런 행보는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학습한 것으로 국왕 권력의 안정을 담보로 한 원만한 국정 운영을 가능케 했던 정치적 유용성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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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Culture and Sports > Division of Cultural Heritage Convergence > 1. Journal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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