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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의 케시크제 도입과 그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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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ontributor.author김보광-
dc.date.accessioned2022-01-01T16:40:19Z-
dc.date.available2022-01-01T16:40:19Z-
dc.date.created2021-08-31-
dc.date.issued2012-
dc.identifier.issn1225-133X-
dc.identifier.urihttps://scholar.korea.ac.kr/handle/2021.sw.korea/134023-
dc.description.abstract이 글은 케시크라는 몽골제국의 제도가 고려에 갑작스럽게 등장하게 된 배경과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케시크의 등장을 전후한 13세기 후반의 고려 상황은 정치적으로 복잡하였다. 대내적으로 무신정권이 100년이라는 장기간 지속되면서 정치를 주도한 탓에, 국왕의 권위가 심각하게 하락하여 국왕은 정치권력구조에서 사실상 배제된 상황이었다. 대외적으로 고려는 몽골과 30년에 가까운 전쟁을 하였으면서도 끝내 항복을 하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還都하게 되어, 고려는 몽골제국으로부터 국가를 유지해야만 하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때에 1269년 임연에 의해 벌어진 원종 폐위 사건은 당시 세자이던 충렬왕에게 왕권 강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하였다. 동시에 자신의 요청을 수용하여 원종의 복위를 도와준 몽골제국에 대해서는 고려(왕실)가 도움 받을 수 있는 우방이라는 인식도 충렬왕은 갖게 되었다. 세자 시절에 이미 몽골에 호의적인 인상을 갖게 된 충렬왕은 몽골제국의 정복지에 대한 전통적인 지배방식에 따라 몽골의 수도에서 숙위를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몽골제국의 世祖 쿠빌라이의 딸인 쿠툴룩 케이미실 공주와 혼인을 하였으며, 숙위의 과정에서 황제를 비롯하여 諸王, 公主, 駙馬 등이 운영하던 측근 조직인 케시크제를 경험하였다. 이들을 통해 황제는 公的 국가기구를 장악할 수 있었다. 충렬왕은 몽골의 지배층이 측근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하는가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으며, 자신도 몽골제국의 부마라는 자각을 하였다. 1274년에 元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자, 충렬왕은 몽골의 풍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한다. 몽골제국의 요구에 의해 정치제도가 개편되기도 하였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코르치와 응방, 비칙치가 충렬왕의 즉위 직후부터 4년에 걸쳐 차례로 설치된 것이다. 충렬왕은 비칙치가 ‘별청재추’라고 불릴 정도로 이들을 통해 ‘緊要한 일’을 처리하여 국정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또 코르치 등을 통해서는 신변의 안전을 확보하고 더 나아가 시위조직의 확충을 통해 국왕 직속의 무력을 손에 넣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응방은 매의 포집과 진상을 담당하면서 그를 매개로 몽골에 대한 별도의 교섭창구를 마련하고 동시에 해외무역에 나설 자본금을 확보하는 등 경제력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충렬왕은 측근을 이들 조직에 임명하여 운영하도록 하였는데, 그들은 케시크 조직의 운영과정에서 불법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관료조직과 케시크 조직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지만, 충렬왕은 케시크 조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응방을 운영하던 핵심 측근인 윤수가 죽고(1283) 측근들이 관료조직에서도 고위직을 점차 차지하여 인사권 등을 장악하게 되면서 충렬왕에게 케시크의 효용성은 이전보다 줄어들었다. 이에 응방을 응방도감으로 바뀌고 비칙치는 정방에 흡수시키는 등의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케시크 조직은 국가의 공적 기구(제도)화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처럼 충렬왕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재정)의 핵심을 자신과 私的으로 유대 관계가 깊은 이들을 중심으로 장악하게 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 달성을 위해서 국왕 자신이 주도적으로 운영할 수 있으면서 정치적으로 효용성이 큰 몽골제국의 케시크제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dc.languageKorean-
dc.language.isoko-
dc.publisher한국사학회-
dc.title고려 충렬왕의 케시크제 도입과 그 의도-
dc.title.alternativeWhy did King Chungryol introduce the kesig system in Goryeo Korea?-
dc.typeArticle-
dc.contributor.affiliatedAuthor김보광-
dc.identifier.bibliographicCitation사학연구, no.107, pp.125 - 168-
dc.relation.isPartOf사학연구-
dc.citation.title사학연구-
dc.citation.number107-
dc.citation.startPage125-
dc.citation.endPage168-
dc.type.rimsART-
dc.identifier.kciidART001697514-
dc.description.journalClass2-
dc.description.journalRegisteredClasskci-
dc.subject.keywordAuthorGoryeo-
dc.subject.keywordAuthorKing Chungryol-
dc.subject.keywordAuthorkingship-
dc.subject.keywordAuthorKesig-
dc.subject.keywordAuthorQorchi-
dc.subject.keywordAuthorBitikchi-
dc.subject.keywordAuthorEungbang-
dc.subject.keywordAuthor高麗-
dc.subject.keywordAuthor忠烈王-
dc.subject.keywordAuthor王權-
dc.subject.keywordAuthor케시크(怯薛)-
dc.subject.keywordAuthor코르치(忽赤)-
dc.subject.keywordAuthor비칙치(必闍赤)-
dc.subject.keywordAuthor鷹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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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Education > Department of History Education > 1. Journal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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