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tailed Information

Cited 0 time in webofscience Cited 0 time in scopus
Metadata Downloads

雍正-乾隆年間 莽牛哨 事件과 淸-朝鮮 國境地帶Qing and Chosŏn Border Control during the Yongzheng and Qianlong Periods

Other Titles
Qing and Chosŏn Border Control during the Yongzheng and Qianlong Periods
Authors
김선민
Issue Date
2011
Publisher
중국사학회
Keywords
Yongzheng Emperor; Qianlong Emperor; Mangniushao; Shengjing General; Borderland; 雍正帝; 乾隆帝; 莽牛哨; 盛京將軍; 國境地帶; 옹정제; 건륭제; 망우초; 성경장군; 국경지대
Citation
중국사연구, no.71, pp.69 - 97
Indexed
KCI
Journal Title
중국사연구
Number
71
Start Page
69
End Page
97
URI
https://scholar.korea.ac.kr/handle/2021.sw.korea/134324
ISSN
1226-4571
Abstract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시기의 범월사건에서 강희년간의 백두산 정계비 설치, 그리고 옹정-건륭년간의 망우초 사건에 이르기까지 후금-청과 조선의 관계에는 언제나 범월과 강역의 문제가 그 중심에 있었다. 다시 말해 양국의 접경지역이야말로 후금에서 청제국으로의 발전과 청-조선 사대관계의 추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지점이었던 것이다.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이 인삼을 캐고 강희제의 관리가 지리 측량을 한 것은 같은 압록강 일대였지만, 각각의 시기에 이 접경지역의 성격과 의미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 명의 종주권이 중원을 너머 요동과 조선에까지 미치던 시기에 조선과 여진은 압록강 일대의 변경을 공유하고 있었다. 조선과 여진의 변경은 명과 여진의 요동과 유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파멜라 크로슬리가 묘사하듯이 요동은 “중간적(between-ness)” 혹은 “超변경적(transfrontier-ness)”인 성격을 띤 지역으로 한인과 여진인의 민족적 경계가 모호한 곳이었다. 이곳은 또한 “사람들의 만남의 공간으로 지리적ㆍ문화적 국경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곳”으로서 “국경이 없는(borderless) 땅”이기도 했다. 선조와 누르하치의 일화가 보여주듯이, 조선과 여진의 경계는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자연적 지리경계에 따라 분명하게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대를 공유하며 혼거하고 있었고, 양자의 관계는 명을 매개로 하고 있었다. 홍타이지가 이끄는 후금의 성장은 배타적인 영역설정을 필요로 했고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불명확한 변경을 허용할 수 없었다. 누르하치의 후금이 “인접하는 두 정치세력, 혹은 사회집단이나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가 모호한 공간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세력을 상대방에게 침투시키고 확장할 여지가 있는 지역”으로서의 변경(frontier)을 갖고 있었다면, 홍타이지의 후금-청은 “인접하는 두 정치세력이 서로의 영토적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설정한 선을 뜻하는” 국경(border)을 원했다고 할 수 있다. 홍타이지는 조선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후금의 배타적인 경계를 원했고, 조선인의 범월은 그에게 조선을 압박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그는 조선을 공격하여 결국 사대관계를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등장하는 분명한 선으로서의 국경은 홍타이지 시기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9세기 말까지 청과 조선은 그들의 접경지역이 변경은 아니지만 국경도 아닌, 일종의 중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 서부사 전공자인 제리미 아델만과 스테판 애론이 제시한 개념인 “국경지대(borderland)”에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변경과 국경 사이에 국경지대라는 중간단계를 설정하고 “두 세력이 서로 경쟁하는 경계”로 정의한다. 두 세력 사이의 공간이 변경에서 국경으로 변화하기 전에 일종의 전환기인 국경지대의 단계를 거치게 되고, 이 때 국경지대는 변경의 성격과 국경의 성격을 모두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경지대는 변경처럼 두 집단이 모호한 경계를 둘러싸고 빈번하게 접촉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인접하는 두 국가가 서로의 세력을 인정하고 타협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중반 망우초 초소 사건은 청-조선 양국의 국경지대가 지닌 경계의 모호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조공관계의 특수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청과 조선의 국경지대에서 조선인의 범월사건은 누르하치 시기부터 건륭년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청의 대응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화해갔다. 초기의 만주족 지배자들이 적대적인 조선으로부터 후금과 청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조선인 범월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했다면, 번성하는 제국이 정점에 이른 18세기의 청 황제들은 공손한 조공국에게 보다 관대한 처우를 내리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망우초 사건에서 보이듯이 성경 변경일대의 지방관들은 조선인의 범월을 방지하고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지만 옹정제와 건륭제는 대신 조선의 편을 들어 이들의 요구를 물리쳤다. 이는 제국의 황제가 세계를 아우르는 보편군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18세기 당시 청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관련지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광대한 제국과 다양한 민족집단을 통치하게 된 18세기의 청 황제는 이제 단순히 만주족의 통치자만이 아니라, 한인, 몽골인, 위구르인, 티베트인을 포함한 제국 내 모든 백성들의 군주가 되고자 했다. 청의 이러한 보편군주 이데올로기는 제국 내부만이 아니라 대외관계에서도 표현되었다. 외국, 특히 조공국과의 관계에서 청 황제는 천하의 모든 신민을 다스리는 천자로 자임했고 이를 위해서는 외국의 요구도 어느 정도는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의 경우,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위협적이지 않은 이웃과 국경문제로 다투는 것보다 오랜 조공국의 충성을 확보하는 것이 보편군주의 위상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결국 외국을 아끼는 천조의 황제는 공순한 조공국 조선의 거듭된 요구를 묵살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조선은 오히려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청과 조선의 관계는 종주국과 조공국이라는 상하 위계질서에 기반한 것이면서 동시에 타협의 여지 또한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국 조공관계의 특수성이 국경지대 본연의 모호성과 만나면서 망우초 초소 설치를 무위로 만들었던 것이다.
Files in This Item
There are no files associated with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Associate Research Center > Research Institute of Korean Studies > 1. Journal Articles

qrcode

Items in ScholarWorks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Related Researcher

Researcher Kim, Seon min photo

Kim, Seon min
민족문화연구원
Read more

Altmetrics

Total Views & Downloads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