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보기
초록
본고는 정조 연간 내각강제문신(內閣講製文臣)에 초계(抄啓)되었던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 1763~1837) 의 갱화(賡和)와 응제(應製)의 사실을 고증하고, 그의 문집에 갱화 및 응제의 시문이 많이 수록되지 않은 이유를 추론한 것이다. 류이좌의 문집 『학서선생문집(鶴棲先生文集)』(이하 ‘학서집’)은 1902년경 목판으로 간행되었는데, 류이좌 생전의 자편고(自編稿)를 저본으로 삼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시의 편수는 많지 않고, 제2권은 만시(挽詩)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유문(遺文)의 정리자 및 간역(刊役) 주체들은 시를 모은 제1권에 류이좌가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있으면서 정조의 어제(御製)에 갱화한 8제, 초계문신친시(抄啓文臣親試)에서 응제한 15제를 전면에 배치했다. 그만큼 류이좌의 초계문신 시들을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시들을 통해류이좌 시의 습숙도(習熟度), 온축의 농밀(濃密), 정론(政論)의 지향(指向)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류이좌는 정조가 현륭원에 배알하여 효성을 보이고 명나라에 대한 보은(報恩)의 뜻을 잊지 않아 맑은 시절을 가져온 사실, 황극(皇極)을 세워 정치를 안정시키고 백성들 삶을 윤택하게 만든 사실을 칭송했다. 하지만『일성록(日省錄)』, 『내각일력(內閣日曆)』, 그리고 갑인년 선발에 가초(加抄)된 이희발(李羲發, 1768~1850)의문집 『운곡집(雲谷集)』을 류이좌의 문집과 대조하여 보면, 갱화와 응제의 시들이 상당히 누락되었다. 더구나친시(親試)나 과시(課試)서 응제(應製)한 시문 가운데 시 이외의 문체들은 거의 수록하지 않아, 전(箋) 2편과 명(銘) 1편만 수습되어 있다. 본래 류이좌는 부화(浮華)한 문풍을 배격하고 자득(自得)의 실공(實工)을 중시했다. 6대조 류원지(柳元之)의 유훈시(遺訓詩)에 차운하여 「선조 졸재선생 9수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敬次先 祖拙齋先生九首詩韻]」을 지은 것을 보면 평소 류이좌는 돈목(敦睦), 자수(自守), 섭세(涉世), 산거(山居), 자책(自責), 권학(勸學), 독서(讀書), 자성(自省) 강조했다. 또 류이좌는 정조가 『어정육주약선(御定陸奏約選)』, 『어정주서백선(御定朱書百選)』, 『사기영선(史記英選)』 등 선집(選集)이나 초집(抄集)을 편찬하는 것에 대해서문교(文敎)의 진작에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하고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간편함을 추구하게 만들까 걱정스럽다고정조에게 의견을 말하기까지 했다. 정조의 초계문신 제도는 정치 이념을 확인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제술의부과는 초계문신의 학문 진작을 방해했다. 정약용(丁若鏞)의 경우도, 초계문신 시절 어제 책문(御題策問)에 대한 대책(對策) 작성을 통해서 학문·지리·경제·정치의 각 방면에 걸쳐 기초지식을 축적했으면서도, 초계문신 시절의 제술에 대해 후회하고 특히 사육문(四六文)의 응제문은 ‘교언(巧言)’이라 규정하고, ‘후회를 표시하기 위해’ 그 대부분을 『열수문황(冽水文簧)』에 수록하여 문집과는 구별했다. 류이좌에게 정조의 학문 기획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의식이 있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류이좌는 수석을 차지한 시문의 경우도 수습해 두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표전(表箋)이나 율부(律賦)의 문체는 정리해 둘 생각이 그리 없었던 듯하다.
키워드
- 제목
-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의 갱화(賡和)와 응제(應製)에 관하여
- 제목 (타언어)
- A Study On the Yu Ijwa’s Interactive and the Responsive Poems by Royal Demands
- 저자
- 심경호
- 발행일
- 2019
- 저널명
- 동양학
- 호
- 76
- 페이지
- 157 ~ 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