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중일전쟁 도발과 조선민중의 경제생활Provocation of the Japanese Empire’s Sino-Japanese War and the Economic Lives of Chosun people with Regard to Food, Clothing, and Shelter
- Other Titles
- Provocation of the Japanese Empire’s Sino-Japanese War and the Economic Lives of Chosun people with Regard to Food, Clothing, and Shelter
- Authors
- 송규진
- Issue Date
- 2018
- Publisher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 Keywords
- 중일전쟁; 대륙전진병참기지화론; 헌금운동; 유언비어; 경제생활; the Sino-Japanese War; the theory of advancing a continental logistics base; movement of offerings; rumors; the Economic Lives
- Citation
- 史叢(사총), no.94, pp.257 - 290
- Indexed
- KCI
- Journal Title
- 史叢(사총)
- Number
- 94
- Start Page
- 257
- End Page
- 290
- URI
- https://scholar.korea.ac.kr/handle/2021.sw.korea/132122
- DOI
- 10.16957/sa..94.201805.257
- ISSN
- 1229-4446
- Abstract
- 1937년 7월 7일에 일본군 이등병 한 명이 행방불명된 사건을 구실로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전쟁에 대한 구실을 계속 만들어 12월 13일에 南京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포로와 민간인을 포함하여 무려 30만여 명을 무차별 학살했고, 이 과정에서 일반 부녀자들에 대한 강간 등의 잔학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총독부는 일본군이 자행한 만행에 대해서는 보도를 통제하여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며 중국군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소한 문제들은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사실을 왜곡했다. 미나미 지로는 ‘대륙전진병참기지화론’을 제기하며 조선에서 물자동원정책을 강행했다. 조선 각 지역에서 헌금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면서 수많은 ‘헌금미담’이 만들어졌다. 일제의 선전선동에 넘어간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헌금을 내기도 했지만 여러 정황상 강제적으로 모금을 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들 가운데 일부는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정책당국과는 다른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총독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조선민중은 대부분 겨울옷을 따로 착용하지 못했으며 소작농의 대부분은 평상복과 외출복의 구별 없이 살았다. 일제하 조선의 농민들은 쌀 및 각종 식량 작물의 증산정책에 의해 생산량을 늘려갔지만 그것이 조선인들의 식생활 향상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공출이 시작되면서 조선인의 곡물 소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욱 열악해졌고 일제패망 직전에 이르러 조선인의 식량소비량은 1910년 시기와 비교할 때 절반으로까지 줄어들었다. 농촌경제의 파탄으로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가 늘면서 도시는 심각한 주택난에 처했고 토막민이 격증했다. 농촌의 영세농도 토막민과 거의 유사한 주거환경에서 생활했다. 일제는 중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연료를 절약해야 한다며 ‘저온생활’의 필요성을 선전했다. 이와 같이 일제의 중일전쟁 도발로 조선민중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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