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正典)이 되었나?How Did the Films of Im Kwon-Taek Become a Canon?
- Other Titles
- How Did the Films of Im Kwon-Taek Become a Canon?
- Authors
- 박유희
- Issue Date
- 2017
- Publisher
- 한국극예술학회
- Keywords
- Anti-communist film; Art film; Canon; Enlightment film; Literary film; Nationalistic film; National policy film; Practicalism; Realism film; The Films of Im Kwon-Taek; 계몽영화; 국책영화; 리얼리즘; 반공영화; 문예영화; 민족영화; 예술영화; 임권택 영화; 정전; 현실주의
- Citation
- 한국극예술연구, no.58, pp.43 - 88
- Indexed
- KCI
- Journal Title
- 한국극예술연구
- Number
- 58
- Start Page
- 43
- End Page
- 88
- URI
- https://scholar.korea.ac.kr/handle/2021.sw.korea/132313
- DOI
- 10.17938/tjkdat.2017..58.43
- ISSN
- 1225-7729
- Abstract
- 이 글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예술영화로 추앙받는 임권택 영화에 대한 재론이다. 본고의 목적은 기존 연구에서 집중해온 임권택 영화의 내재 미학에 대한 구명과는 궤를 달리하여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임권택 영화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국면을 밝히는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에서 축적되어온 평가, 즉 임권택 영화가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국면을 드러내고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고자 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임권택 영화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로 정전이 될 수 있었는지를 묻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임권택 영화 미학이 어떤 과정과 역학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하였다. 이를 통해 임권택 영화 미학의 맥락과 임계를 밝히고,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영화의 정체성을 성찰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임권택 영화는 1970년대를 기준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뉘어 논의되어 왔다. 그리고 후기에 해당하는 영화를 중심으로 작가주의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은 1970년대에는 국책에 부응하여 반공·계몽영화를 충실히 만들었고, 1980~90년대에 예술영화를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공영화와 계몽영화를 계속 연출했다. 또한 그가 이념 관련 영화를 만들 때 그것은 국가가 허용하는 범주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국가의 한계치 내지 지향과 작가의식을 조응시키며 지속적으로 국가의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국가의 보상과 해외영화제에 대한 기대 속에서 입지를 확보해갔다. 따라서 1970년대 국책영화와 그러한 틀을 답습한 이후 영화정책은 임권택 감독의 존재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이후 임권택 영화에서는 전쟁과 분단, 이념갈등, 계급모순 등의 문제를 개인의 구도(求道)나 여성수난과 절합하며 할리우드 영화와 변별되는 미학을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임권택 영화는 보수적이고 계몽적이면서도 엄정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보여주며 충무로에서 1980년대 한국의 당면 문제를 다루는 영화로서의 위상을 구축해간다. 그러면서 1970년대에는 국책영화의 맥락에 놓여 있던 임권택 영화가 리얼리즘 영화 내지 예술영화로 호명되기 시작한다. 한편 임권택 감독은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해외영화제로의 진출을 도모한다. 마침 해외영화제에서는 탈냉전의 기류를 타고 동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로컬리티를 전면화하는 영화들이 속속 입상하고 있었다. 이때 임권택 영화는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영화로 나서게 된다. 이로써 상충될 수도 있는, 리얼리즘과 국가가 지원하는 예술영화는 ‘내부에의 억압’와 ‘외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민족 이념의 양가성 속에서 역시 양면성을 지닌 임권택 감독의 도저한 현실주의를 통해 손잡는다. 생존하기 위한 데에서 출발한 임권택 감독의 현실주의는 한때 리얼리즘 영화로서의 성취를 이루었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시 살아남기 위해 얼마든지 변모하고 정향될 수 있는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임권택 영화는 ‘한국적 예술영화’라는 깃발 아래 유럽영화제 수상을 향해 한층 경도된다. 그러면서 그의 영화는 리얼리즘에의 탐구를 내려놓고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역사의 수난에 순응하는 태도를 한국인 고유의 정서로 미화하는 영화로 정향된다.
해방 이후 한국의 예술영화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문학에 비견되는 예술성, 서구영화제에서의 인정,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 영화에 근접하는 영상미,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향토색, 당대 현실 문제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종교적·예술적 고뇌 등이었다. 임권택의 작가주의 영화로 분류되는 영화들 중 1980년대 영화의 상당수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당대 현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임권택 영화가 그러한 치열함을 <태백산맥>까지 밀고 나갔다면 한국영화의 임계는 보다 확장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임권택 영화에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와 현실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도저한 현실주의가 저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그의 영화는 정전이 될 수 있었다. 예술영화를 넘어 정전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의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 내거나 통합적 의견을 대표할 수 있는 힘을 필요로 한다. 정전은 해당 문화에 대한 허구적 정체성을 상징화하는 동시에 공고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라진 전설 <아리랑>이나 해방 이후 선구적인 리얼리즘 영화로 대접받는 <오발탄>이 한국영화 정전의 계보를 구성해왔다. 임권택 영화는 <서편제>에 이르러 이 계보에 확실히 이름을 새기게 된다.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 예술영화라는 깃발과 함께 현실과 대면하는 것을 내려놓고 보수적 예술의 맥락으로 정향하면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의 경지는 가부장의 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민족의 수난으로 추상화하고 그로 인한 비극을 민족 고유의 정서로 합리화하며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오발탄>의 세계보다 오히려 퇴행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임권택 영화의 한계는 분단된 한국을 대표하는 반쪽 민족영화의 한계이자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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