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정교회의 분열과 한국 러시아정교회The Division of Russian Orthodox Church and the Russian Orthodox Church in Korea
- Other Titles
- The Division of Russian Orthodox Church and the Russian Orthodox Church in Korea
- Authors
- 민경현
- Issue Date
- 2017
- Publisher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 Keywords
- 러시아정교회; 흐리산프 솃콥스키;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신성종무회의; 세르기 티호미로프; 해외러시아정교회; 북미관구; 벤야민 바살리가; 일본정교회; Russian Orthodox Church; Khrisanf Schetkovskii; Polikarp Priimak; Holy Synod; Sergii Tikhomirov; Russian Orthodox Church Outside Russia; North American Metropolia; Veniamin Basalyga; Japanese Orthodox Church
- Citation
- 史叢(사총), no.92, pp.361 - 384
- Indexed
- KCI
- Journal Title
- 史叢(사총)
- Number
- 92
- Start Page
- 361
- End Page
- 384
- URI
- https://scholar.korea.ac.kr/handle/2021.sw.korea/132360
- DOI
- 10.16957/sa..92.201709.361
- ISSN
- 1229-4446
- Abstract
- 한국 러시아정교회 실질적인 선교는 1900년 2월 흐리산프 솃콥스키(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 신부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예배를 시행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후 러시아정교회는 러일전쟁, 한일강제병합, 러시아 혁명과 내전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도 중단없이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정교회는 주한 러시아 교민사회와 밀접한 연계를 유지했고, 이는 정교회의 진로가 러시아 교민사회의 향방에 좌우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 예로 백군파 러시아인들이 교민사회의 주축을 이룬 1920년대는 정교회가 반공을 기치로 내걸어 소련총영사관과 대립했고,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이 승전국이 되어 주한 러시아 교민사회와 관계가 개선되자 정교회는 소련 총영사관과 교류를 시작하기도 했다. 앞의 경우는 일제 식민지 치하 조선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존속에 이바지했으나, 후자의 경우는 미군정과 남한 정부의 의심과 반감을 초래하여 1948년 12월 폴리카르프 프리마크(Поликарп Приймак) 신부가 선교회로부터 축출되고 남한으로부터 추방됨으로써 러시아정교회 한국선교의 중단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 러시아정교회는 1897년 신성종무회의 결정에 따라 설립되고 러시아정교회 소속이었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위기를 맞고 성 시노도스의 결정으로 관할권이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되었다. 1924년 소련이 일본과 수교한 후에는 일본 정교회 재단으로 등기하기도 했다. 그후 세르기 주교가 타계한 후에는 신설된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로 관할권이 편입되었다.
한편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망명자들은 러시아 교회 지도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해외에서 독자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이 러시아 망명교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1921~1922년 세르비아 정교회 총대주교가 지원하고 소집한 망명 러시아인 주교들의 카를로브치 시노도스(Карловацкий Синод) 중심의 해외러시아정교회(Рус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Церковь заграницей)였으며, 다른 하나는 1927년 12월 19일 '러시아정교회 미주교구 주교 시노도스'로부터 새로운 자치독립교회 조직의 설립을 선언한 북미관구(Северо-Американская Митрополия), 즉 현재의 미국정교회(Orthodox Church in America)였다.
해외러시아정교회는 1925년 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북한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이르 기반으로 한국 러시아정교회 선교회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해외러시아정교회에 소속된 평양선교지부의 반소반공주의는 특별히 강력했다. 소일전 시기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진공하자 한국인 정교도들은 서울로 월남하여 한국 러시아정교회 선교회로 들어갔다.
소련에서 스탈린은 독소전쟁 시기 정교회와 화해에 나서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복원되도록 지원했다. 이에 따라 한국 러시아정교회와 모스크바 총대교구의 관계가 개선되자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월남한 정교 신자들의 불안은 결국 폴리카르프 신부를 축출하고 한국 러시아정교회 선교회를 장악하려는 행동에 나서게 했다. 이 시기 일본정교회는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협조 아래 북미관구가 장악하여 1947년 1월 7일부터 러시아계 미국인 벤야민 바살리가(Вениамин Басалыга) 대주교가 관할하고 있었다. 1949년 6월 18일 폴리카르프 신부가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됨으로써 한국 러시아정교회는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중단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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