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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시기 朝鮮・明관계와 箕子인식의 양상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Joseon and Ming during Imjin War and the Aspects of Understanding on Jizi(箕子)

Other Titles
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Joseon and Ming during Imjin War and the Aspects of Understanding on Jizi(箕子)
Authors
김경태
Issue Date
2016
Publisher
고려사학회
Keywords
Old Joseon; Jizi(箕子); Imjin Waeran; Imjin War; the Jizi’s shrine; the Jizi’s tomb; well-field(井田); 고조선; 기자; 임진왜란; 임진전쟁; 기자 사당; 기자묘(箕子墓); 정전(井田)
Citation
韓國史學報, no.65, pp.165 - 194
Indexed
KCI
Journal Title
韓國史學報
Number
65
Start Page
165
End Page
194
URI
https://scholar.korea.ac.kr/handle/2021.sw.korea/132614
DOI
10.21490/jskh.2016.11.65.165
ISSN
1229-6252
Abstract
조선은 이전의 왕조들과 달리, 중국의 한족 왕조인 명과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부터고대에 箕子가 동쪽으로 와서 문화를 전래하였다는 부분을 강조하였다. 기자는 조선이역사와 사상적인 면에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성격을 정리해야만 하였던 인물이었다. 조선은 내부적으로도 기자라는 건국의 시조 중 한 사람에 대한 정리 작업을 지속하였다. 조선의 기자 인식은 이후 여러 계기를 거치며 변용되었다. 임진왜란은 기자에대한 인식의 변화가 촉발되는 계기 중 하나였다. 평양의 기자 사당은 조선을 구제해준 명나라 장수들이 제사를 지낸 곳으로서 정비를 거쳐 ‘기자의 후예’가 제사를 모시는숭인전으로 탈바꿈하였고, 사실상 방치되어 있던 기자 무덤도 대대적으로 재정비되었다. 재정비는 재인식으로 이어졌다. 특히 기자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井田’의 흔적도전제 개혁안의 소재로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직전까지 조선에서는 예의의 나라로서의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가 고조되던 양상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거치며, 기자의 나라를 회복해준 명에 대한 고마움, 조선과 명이 같은 배를 탄 나라라는 의식이 증가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즉, 전쟁 이후, 명이기자의 땅을 회복해준 데 대한 고마움과 동류의식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시간적으로는임진왜란, 공간적으로 평양에서, 조선의 기자 담론은 한 차례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였고, 17세기 이후 다양하게 진행된 변용과 재인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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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Liberal Arts > Department of Korean History > 1. Journal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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