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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남경과 친원세력의 동향 -금석문을 중심으로-Pro-Yuan Forces in Nanjing during the Late-Goryeo Dynasty -Based on inscriptions-

Other Titles
Pro-Yuan Forces in Nanjing during the Late-Goryeo Dynasty -Based on inscriptions-
Authors
김난옥
Issue Date
2015
Publisher
서울역사편찬원
Keywords
奇轍; 蔡河中; 보암사; 중흥사; 銘文; 親元勢力; Ki Chul; Chae Hajung; Boamsa Temple; Jungheungsa Temple; inscription; pro-Yuan forces
Citation
서울과 역사, no.90, pp.5 - 31
Indexed
KCI
Journal Title
서울과 역사
Number
90
Start Page
5
End Page
31
URI
https://scholar.korea.ac.kr/handle/2021.sw.korea/132918
DOI
10.22827/seoul.2015..90.001
ISSN
2466-1465
Abstract
보암사동종은 기평장이 주조하여 시납한 것인데, 고려말 자료에서 단 두 명의 기평장을 찾을 수 있다. 그 중 공민왕대에 고려에 사신을 보낸 北元의 기평장이 남경에 와서 동종을 주조했을 개연성이 희박하다. 따라서 보암사동종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기황후의 오라비인 奇轍로 판단된다. 「기평장봉사록서」에 의하면 기철은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고려에 焚香使로 파견되었는데, 그 해가 바로 至正 기축년인 충정왕 1년(1349)에 해당된다. 「기평장봉사록서」에서 기철은 평장사 덕성대군으로 지칭되었는데, 당시 고려는 중서문하성 체제가 아니어서 평장사 직함이 없으므로 덕녕공주가 왕후와 기철에게 정동행성을 임시로 감독하도록 했을 때 기철이 정동행성 평장사 직함을 띤 것으로 판단된다. 종전에 보암사동종은 ‘을축’이라는 명문으로 인해 1325년에 주조된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여러 가지 상황을 보면 을축이 아니라 기철이 분향사로 파견된 己丑이 잘못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고려사』를 비롯한 고려시대 史料에서 ‘乙’과 ‘己’가 혼동되거나 잘못 판각된 사례로 미루어 볼 때, 보암사동종의 조성연대는 1325년의 乙丑이 아닌 1349년 己丑으로 판단된다. 중흥사향로의 명문 역시 고려말 친원세력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제공해준다. 중흥사향로 제작의 단월인 채하중은 친원세력가로서 『고려사』 열전 간신전에 입전된 인물이다. 채하중은 고려국왕과 심왕의 알력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모반에 연루되어 사망할 때까지 정치가로서 승승장구하였다. 이러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채하중이 남경 지역의 사원인 중흥사에 향로를 시납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중흥사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원이었기 때문이다. 중흥사에 주석한 승려가 寫經과 불경의 해석 등을 통해 원나라와의 사상적 교류에 참여한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원나라 황제와 고려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한 목적과 개인적인 성불의 염원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중흥사향로의 제작은 채하중이라는 권력층의 고도의 정치적 의도가 담긴 佛事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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