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영화에 나타난 태평양전쟁의 표상Representation of the Pacific War in South Korean Films
- Other Titles
- Representation of the Pacific War in South Korean Films
- Authors
- 박유희
- Issue Date
- 2014
- Publisher
- 한국극예술학회
- Keywords
- Action Genre; Censorship; Desertion Narrative of Student Soldiers; Heonhaetan Knows; Korean War; Marriage Obstacle; Melodrama; National Division; Representation; Sorrowful Youth; Sunset in the River Sarbin; the Pacific War; World War II; 검열; 멜로드라마; 분단체제;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액션활극; 제2차 세계대전; < 청춘극장> 태평양전쟁; 표상; 학병탈주서사; 한국전쟁; < 현해탄은 알고 있다> 혼사장애
- Citation
- 한국극예술연구, no.44, pp.101 - 137
- Indexed
- KCI
- Journal Title
- 한국극예술연구
- Number
- 44
- Start Page
- 101
- End Page
- 137
- URI
- https://scholar.korea.ac.kr/handle/2021.sw.korea/133365
- DOI
- 10.17938/tjkdat.2014..44.101
- ISSN
- 1225-7729
- Abstract
- 본고는 제2차 세계대전의 아시아-태평양 전선으로서의 ‘태평양전쟁’이 남한영화에서 재현되어 온 양상을 살피면서, 남한영화사에서 태평양전쟁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기 위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태평양전쟁은 한국의 식민지 체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영화사에서는 태평양전쟁이 주로 장르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주요 제재가 되지 못했다. 이에 본고에서는 남한영화에 나타난 태평양 전쟁의 재현 양상을 통시적으로 살펴보면서 남한영화에서 태평양전쟁이 원경화(遠景化)된 이유를 밝혀본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남한영화의 목록을 정리한다. 그리고 3장부터 5장에서는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5), <청춘극장>(1967, 1975)을 태평양전쟁의 재현 양상에 주목하여 분석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한국영화에 나타난 태평양전쟁 표상의 맥락과 의미를 정리한다.
1960년대 전반기에 한일수교를 앞두고 <현해탄은 알고 있다>와 같이 “한국과 일본의 상상적 화해”를 보여주는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4.19의 여파이자 경제개발을 위해 한일수교가 필요했던 박정희 정부가 긍정적인 여론을 이끌어내고자 취한 전략의 소산일 뿐이었다. 1965년에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오히려 한일문화 교류의 분위기는 경색되었다. 한일수교로 외자 유치라는 목표를 달성하자 반공주의를 체제 유지 이념으로 더욱 강화하기 시작한 박정희 정부가 북송선과 조총련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남한보다 사상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도 발전한 일본에 관한 정보의 유입을 더욱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4.19 이후 한일 문화 교류의 분위기를 타고 식민지 경험에 대한 다각적 접근이 일시적으로 가능해지면서 본격적 논의가 가능할 뻔 했던 ‘태평양전쟁’ 문제도 1965년 이후에는 더욱 머나먼 배경으로 원경화(遠景化)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션․활극의 형태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조선 청년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영화들은 식민지 경험을 재현하는 데 1960년대 중반의 상황적 인식이 착종되며 흥미로운 균열을 드러낸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의 ‘수남’과 같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조선 청년은 일본을 적으로 간주하면서도 일본을 인정하고, 감정에 좌우되어 민족을 내세우지만 자신조차 지키지 못한다. 이는 식민 사관에 대해 합리적인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남한 체제의 한계와 연관되어 있다.
1970년대 이후에는 민족주의를 명분으로 한 반공주의의 강화로 인해 당시의 일본을 재현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한편 남한영화 전반에서 이분법적인 도식이 강화되어 식민지 시대를 그리더라도 일본을 ‘절대 악’으로 그리게 된다. 따라서 ‘친일’은 ‘민족적 배신’으로 단순화되고 추상화된다. 식민지 시대에 대해 심도 있게 재현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없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태평양전쟁’에 대한 기억도 더욱 배제된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배제에는 ‘한국전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동족상잔’이라는 더 큰 트라우마 때문에 태평양전쟁은 남한 사람들의 집단 기억 속에서 밀려나고, 전쟁에 대한 기억과 담론의 장은 한국전쟁으로 치환된다. 더구나 한국전쟁 이후에 공고화된 분단체제는 더욱 많은 기억을 발화되지 못하도록 만들며 태평양전쟁을 역사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혔다. 예컨대,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많은 조선인들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살았는데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항일유격대와 조선의용군, 징용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동포 등을 논할 때 분단국가가 처한 이념적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또한 태평양전쟁 참전 경험과 친일의 문제 등을 논할 때 남한 사회가 처한 정치적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대중적 파급력이 큰 매체여서 정부와 정책의 검열을 엄격하게 받았던 영화에서는 그 상상적 재구성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전쟁이 멜로드라마나 액션․활극과 같은 오락적 소비재로 간주되었던 장르 영화의 형태로 재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다큐멘터리를 통해 숨겨진 역사에 대한 증언들이 터져 나올 때 위안부 문제가 가장 먼저 부각되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는 이념과 관계없이 인권적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 이슈였던 것이다.
여전히 태평양전쟁은 남한에서 머나먼 전쟁이자 말하기 불편한 전쟁이다. 남한영화에서의 태평양전쟁에 대한 새로운 재현 문제는 과거사에 대해 이념을 넘어 보다 자유롭게 다각도로 논의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성숙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단 문제의 해결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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