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문서를 통해 본 후백제와 일본의 외교 양상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Later Baekje and Japan as Seen Through Diplomatic Documents
- Other Titles
- 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Later Baekje and Japan as Seen Through Diplomatic Documents
- Authors
- 박현숙
- Issue Date
- 2017
- Publisher
- 역사학회
- Keywords
- 후백제; 견훤; 일본; 『本朝文粹』; 『扶桑略記』; 大宰府; The Later Baekje (후백제); GyeonHwon(견훤); Japan(일본); HonchōMonzui(本朝文粹); Fusouryakki(扶桑略記); Dazaifu(大宰府)
- Citation
- 역사학보, no.236, pp.145 - 173
- Indexed
- KCI
- Journal Title
- 역사학보
- Number
- 236
- Start Page
- 145
- End Page
- 173
- URI
- https://scholar.korea.ac.kr/handle/2021.sw.korea/132265
- DOI
- 10.16912/tkhr.2017.12.236.145
- ISSN
- 1225-1615
- Abstract
- 후백제 견훤이 922년과 929년에 일본에 使者를 파견하여 通交하려는 뜻을 전한 ‘牒’을 국가 간의 외교문서라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았다. 후백제와 일본 사이의 通交가 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일본 측의 배경과 후백제 견훤의 對日外交의 목적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922년 후백제 사신이 대마도를 거쳐 大宰府에 와서 ‘牒’과 ‘方物’을 바친 내용이 『本朝文粹』의 ‘大宰答新羅返牒’으로 전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 견훤은 ‘一千年之盟約’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백제의 선례에 따라 일본과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뜻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朝覲의 禮는 陪臣이 행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명분으로 후백제와의 첫 통교를 거절하였다. 이에 견훤은 929년에 다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 기록은 『扶桑略記』에 전한다. 그러나 후백제 사신에 대한 태정관의 조치는 지난번과 같이 사신 일행을 추방한 것이었다.
후백제의 922년과 929년의 對일본 통교가 실패로 끝난 일본 측의 배경은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격변기를 맞아 자국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외교정책을 지향한 일본 조정이 후백제와의 通交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율령제 도입 이후에 외교의 원칙이 된 ‘爲人臣者 無外交’를 내세워 返牒의 수신자를 ‘新羅’로 하면서, 후백제 견훤의 通交를 공식적으로 거절하였다.
한편, 견훤의 일본에 대한 사신 파견 목적은 전주 定都 이후에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吳越등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922년에 일본에 使者를 파견하여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국제적으로 후백제를 하나의 국가로, 견훤을 왕으로 인정받고자 한 절차였다. 일본에 대한 929년의 2차 사신 역시 927년에 신라 景哀王을 시해한 것을 계기로, 신라와의 君臣 관계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후백제의 왕이 되고자 한 것이었다. 이제 견훤은 신라의 신하가 아니라, 후백제왕으로서 일본에 공식 사절을 보낸 것이다. 견훤은 일본과 정식 외교 관계를 맺음으로써, 동아시아 교섭에 있어서 지역 권력에서 벗어나 공식적인 국가 권력으로 인정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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